기부, 자선, 채러티, 필란트로피
일전에 모 모금기관의 신입사원 교육을 하면서 교육 말미에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세금이라는 방법이 나을까 아니면 기부라는 방법이 나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게 한 적이 있었다. 모금기관에서 일을 하게 될 친구들이라 아무래도 세금보다는 기부 쪽에 비중을 두고 토론이 전개되기는 했지만, 나름 세금 쪽을 지지하는 친구들도 보편적 복지니 선별적 복지니 하는 이슈와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해 간 것으로 기억된다. 이와 같은 강제적인 성격의 세금과 자발적 성격의 기부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삶의 질을 바꿔나가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연구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리말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뭔가 값어치 있는 것을 줄 때 이런 행위를 ‘기부한다’고 하며 이를 ‘자선,’ ‘박애,’ ‘나눔’ 등 다양한 용어로 함축해서 표현한다. 이에 상응하여 영미권에서는 일찍이 ‘채러티’(charity) 혹은 ‘필란트로피’(philanthropy)와 같은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별다른 구분 없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들 두 용어는 다른 용어들에 비해 더 많은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각각은 서로 구별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최근 들어 필란트로피라는 용어는 벤처 필란트로피(venture philanthropy), 크리에이티브 필란트로피(creative philanthropy), 그래스루츠 필란트로피(grassroots philanthropy ) 등 수식어를 동반한 용어에서부터 필란트로픽 파운데이션(philanthropic foundation), 필란트로픽 인스티튜션(philanthropic institution) 등 형용사적인 사용, 그리고 필란스로피(philanthropy)와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합해진 필란트로캐피탈리즘(phianthrocapitalism)이라는 합성어에 이르기까지 ‘필란트로피’라는 단어는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되었다.
채러티와 필란트로피의 차이
일반적으로 ‘채러티’는 빈자(貧者)에 대한 관대함,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동정심과 같이 개인적인 차원의 관심과 자비심에 근거한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채러티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자 아무런 조건 없이 단순히 돈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이런 성격으로 말미암아 비판적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즉 이들 행위는 어떤 인간도 고통 받아서는 안 되며 도움을 줄 능력을 갖춘 자가 이들을 도와야만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빈자를 점점 더 곤궁에 빠뜨리게 되고 타락시킬 수 있으며, 빈자를 부자의 피부양인화하고 부에 따른 서열화를 가속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채러티라는 행위에 대해 회의적 평가가 제기되기도 한다. 또 다른 부정적 평가는 채러티가 빈곤의 원인이나 이에 대한 장기적 해결책보다는 대증적 요법에 초점을 둠으로써 문제의 근본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적 변화보다는 단지 기부자의 열정을 표현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외에도 채러티는 정부의 임무를 대신함으로써 정부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게 한다는 점,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접근과 해결책을 방해한다는 점 등이 그 한계로서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필란트로피’는 협의의 의미에서 돈을 기부하는 것, 그리고 교환가치가 있는 것의 일방향적인 전달(one-way transfer of exchangeables), 즉 대가없는 전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보다는 인류(humanity)라는 집합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인류의 발전, 사회서비스를 위한 대규모의 기관 혹은 조직화된 기구에 돈을 기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차별성을 갖는 필란트로피라는 용어는 서구의 역사 속에서 좀 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필란트로피는 공익을 위한 자발적인 행동, 자발적인 서비스, 자발적인 기부의 의도적이고 계획된 과정이라는 개념, 인간에 대한 사회적 서비스 증진을 위한 행위라는 개념, 다소 제한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자선 기관(philanthropic organization)’, ‘자선 협회(philanthropic association)’, ‘자선 영역(philanthropic sector)’, ‘자선 재단(philanthropic foundation)’과 같이 형용사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것처럼 공익의 증진을 위한 비정부적 기구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존재라는 개념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차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채러티가 개인적 차원의 소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감성적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면, 필란트로피란 이런 감성을 갖고 사회적, 구조적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삶의 질의 향상, 사회적 약자 및 소외 계층을 위해 시간 및 돈을 자발적으로 기부하고 받는 행위라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필란트로피’가 ‘채러티’를 대체하면서 지배적 위치를 점해 가는 데는 이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자조’(自助, self-help)와 ‘기회창출’(opportunity creation)이라는 원칙, 그리고 절망과 빈곤의 완화가 아니라 근본적 원인의 제거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은 필란트로피와 채러티를 구별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며 자선 혹은 기부라는 행위가 진화해가는 전기를 이루게 된다. 즉 20세기 초반, 절망과 빈곤의 단순한 완화가 아니라 근본적 원인의 제거라는 인식의 전환과 변화는 ‘과학적 필란트로피’(scientific philanthropy), 기부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새로운 현상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필란트로피’(philanthropy)’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함의
서구의 역사 전개와는 달리, 우리의 역사는 20세기를 전후로 ‘개항’이라고 일컫는 서구 사회와의 접촉은 곧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화로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해방과 함께 온 분단, 내전과 확전, 냉전 그리고 권위적 정권과 경제 개발, 민주화 등등의 드라마틱한 역사 전개는 그 해석을 둘러싸고 국내외적으로 많은 논란거리 제공하기도 하지만, 21세기를 전후하여 자발적 기부와 나눔, 자원봉사 등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핵심적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영역에서 괄목할만한 진화를 거듭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영역과 관련된 법과 제도의 제정 등 국가의 역할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이, 한편으로는 필란트로피, 그 자체보다는 소위 모금, 나눔, 자원봉사 등을 둘러 싼 영역 다툼으로,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 시장, 공론의 장으로서 시민사회 간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이런 작금의 상황과 소통하면서 ‘필란트로피’(philanthropy)라는 용어의 개념과 정의는 무엇이고 서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변천해 왔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하는 함의는 무엇인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글. 이형진(아르케 대표,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잘읽고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