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의로움
이 그림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 동래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성은 이미 함락되어 왜군 천지이고 관군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지붕 위에 남자 한 명과 아녀자 두 사람이 기왓장을 뜯어 던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향해 왜군 한 명이 조총을 겨누고 있는데, 그 옆에서 다른 왜군 두 명이 ‘내가 그간 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저런 모습은 생전 처음 본다’는 듯 갸우뚱해하고 있습니다. 군인도 아닌 사람들이 도망할 생각은 아니하고 지붕에서 뭣들 하는 거지? 하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아마 왜가 조선을 침공하기 전에 세운 계획에는 전혀 고려에 넣지 않았을 것입니다(조선에 넣…). 의병 또는 행주치마의 연원이 이 그림에 나타나 있지요. 왜인이 자기 나라에서 전혀 보지 못한 모습을 조선에서 본 이유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윗사람의 명령보다는 양반과 백성의 자발성으로 받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보기에 의병이 ‘뜻은 가상하나 전과에 별 도움은 안 됐’는지 모르겠으나, 사실 기여도를 따지기 전에 승산을 보고 일어나는 것은 전혀 의병답다고 할 수 없음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이해타산보다 의로움을 앞세우고, 나라가 위태함에 목숨도 내어놓는[見利思義, 見危授命]’ 뜻으로 일어나야 의병답지요.
의로움은 뜻이 넓다
의병의 ‘의(義)’를 ‘옳을 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글자에는 ‘옳다’ 혹은 ‘옳은 것’보다 더 넓고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우선 ‘남을 나의 혈육처럼 여기는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김보성의 트레이드마크인 ‘의리’가 이런 뜻일 겁니다. 여기에서 이 뜻은 보다 확대되어 ‘공적인 것’ 또는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뜻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의용군(義勇軍), 의연금(義捐金)의 ‘의’는 이런 뜻에 가까워 보입니다. 영어의 philanthropy가 charity(자선)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라면, ‘의(義)’가 이에 매우 근사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한국적 필란트로피의 기원을 찾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우리 윗동네와는 물론 과거 조선과는 제도적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운영 시스템인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비롯한 많은 것들은 서구에서 수입한 것이지, 조선에서 계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신은 – 물론 제도의 영향을 크게 받겠지만 – 제도만큼 단절되는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과거에나 지금에나 의식되지 못하는, 깊이 내면화되어 무의식에 속하게 된 정신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도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내면에는 뭔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면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분명히 존재하는 듯합니다. 이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이런 점에 주목하여 필란트로피의 한국적 맥락을 우리 역사 속에서 찾으려는 연구자가 있으실 줄로 압니다. 아직은 각자의 언어 속에 유리(遊離)되어 있으시겠지만, 곧 만납시다. 저도 그 날을 당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해타산보다 의로움을 앞세우고, 나라가 위태함에 목숨도 내어놓는……..이라니 돈키호테…도 떠오르는데, 요즘 대구로 달려가는 의료인들을 떠오르게 하는 문구군요.. 대한민국 역경극복의 힘이 이런 정신에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읽으니 한국의 현재 모습이 뿌리 깊은 전통이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