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총서 11권 ‘이타주의자의 시대-유럽 필란트로피의 뿌리와 현대적 재발견’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의 필란트로피학과 교수인 테오 슈이츠님이 쓴 ‘Philanthropy and the philanthropy sector’을 번역한 것입니다. 한글 제목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필란트로피’의 개념이 많이 알려지게 되면 다음에는 그냥 원제목을 살려 책을 낼 수 있게 되길 기대합니다. |
Q1. 우리가 유럽 필란트로피에 대한 내용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간 필란트로피에 관한 다양한 지식이 미국에서 건너왔습니다. 주로 재단이나 모금관련 책이나 글, 강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우리 기부문화총서 역시 미국 저자들의 저작을 번역해왔습니다. 간혹 “미국은 ‘약한 국가’모델로 민간의 역할이 큰 나라이고, 한국은 미국보다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는 모델인데 한국의 민간기부가 미국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복지국가’모델을 중요시하는 유럽의 맥락에서 민간기부 즉, 필란트로피를 기술한 이 책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한국에서 필란트로피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에 대한 좀 더 균형적인 시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Q2. ‘필란트로피’란 무엇인가? ‘기부’나 ‘나눔’, ‘자선’으로 번역할 수는 없었나?
Philanthropy를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면 ‘박애’라고 나옵니다. ‘박애’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함’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자료에서는 ‘philanthropy’를 ‘charity’와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Council of Foundation의 전 CEO인 Steve Gunderson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원문보기]
“Charity가 주로 구조와 구호에 중점을 두는 단기간의 정서적, 즉각적 반응에 가깝다면, Philanthropy는 훨씬 장기적이고 전략적이며 재건에 중점을 둡니다. 제 동료 중 한 명은 좋은 일을 하는 곳은 Charity, 문제 해결을 하는 곳은 Philanthropy라고 부르는데, 저 또한 그것이 두 단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1장 ‘필란트로피의 영역과 개념’에서 저자는 ‘philanthropy’라는 단어에 대한 서유럽만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서유럽 사람들에게 필란트로피라고 하면 “교회를 중심으로 한 자선 활동이나 빈민구제, 엄청난 사회적 불평등과 교회의 우월의식이나 온정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7장 ‘유럽에서의 필란트로피’에서 더 자세히 기술합니다.
저자는 계급사회시대의 자선활동과는 다른 ‘현대적 필란트로피’가 출현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2차대전 이후 부의 증가, 둘째, 인구의 고령화 및 적은 수의 자녀가 큰 유산을 상속받음. 셋째, ‘지구촌 시민’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민의식과 스스로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각 나라나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른 ‘현대적 필란트로피’의 정의를 검토하며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글로벌한 정의를 내립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필란트로피는 타인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그리스어 ‘philos anthropos’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인류에 대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나 집단, 그리고 사회의 안녕을 위한 자발적 헌신을 가리킨다…현대 필란트로피학의 창시자인 밥 페이턴에 의하면 필란트로피는 ‘공공선을 위한 자발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으며, 더 구체적으로 기빙네덜란드의 정의에 따르면 ‘필란트로피는 일차적으로 공공선에 기여하는 행위로, 공공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개인이나 조직이 현금이나 물품, 시간, 재능 따위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유색인 소수민족의 사례를 통해 현대의 글로벌한 필란트로피의 정의에서는 ‘아는 사람들 간의 도움’을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언급합니다. 즉, 공공선을 위해 나와 직간접적 관계가 없는 대상을 위해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행위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Giving KOREA에서 한국인의 기부금이 낮게 나온 것이 mutual giving 즉, 경조사비 지출이 많은 것과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는데, 우리 사회가 이타성이 낮다기보다는 그러한 도움을 ‘서로 아는 공동체’를 통해 주고받는 부분이 더 크다는 것이고, 그러나 이것은 현대적 필란트로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기부’, ‘나눔’, ‘자선’이라는 단어들은 필란트로피가 가진 의미 일부를 담고 있지만 모든 맥락과 의미를 표현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필란트로피’를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Q3. 복지국가의 맥락에서 ‘필란트로피’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7장’유럽에서의 필란트로피’에서 저자는 서유럽의 필란트로피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필란트로피는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데, 중세에는 사람들이 구원과 영생을 위해 자선을 행하였다. 이는 신분과 계급의 구분을 유지하는 기제로 기능하기도 하였다…(중략) 19세기와 20세기 초에 필란트로피는 또다시 사회적 지위의 구분과 직접 연관되었다…’나는 필란트로피를 단순히 자선 행위가 아니라 상류층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중략) 20세기 서유럽에서는 빈곤과 사회보장, 헬스케어, 교육과 관련한 문제를 복지국가에서 관장하였다. 필란트로피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복지국가의 확대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즉, 서유럽인들은 필란트로피를 중세시대 귀족들의 활동이었으나 복지국가시대에는 큰 의미가 없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필란트로피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고 하는데, 시장이나 국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복지의 문제에 민간 필란트로피가 함께 참여할 필요성과 사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복지국가시대의 필란트로피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다양한 이론의 검토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간단하게 사회적 니즈에 대한 시장,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한 이해와 같은 프레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공공선’으로 표현되는 각종 사회적 필요(요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은 일차적으로는 시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을 지불하지 못하는 취약계층을 위해서 국가가 보조금이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이것이 복지국가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국가 또한 여러가지 측면에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급변하는 사회의 다양한 필요(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국가라는 형식이 매우 무겁고 느리다는 점과 더 현실적으로는 관료제가 가져오는 폐해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국가냐, 시장이냐’라든가 ‘복지국가냐, 필란트로피냐’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복지국가의 성취를 유지하면서 시민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필란트로피가 복지의 중요한 파트너로 인정받고 그만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정부와 필란트로피 분야 사이에서 계약을 맺어 협력하는 문화와 태도를 만든다고 합니다. 이 계약에는 ‘주기적 협의, ‘정보교환’이나 ‘관련 규정을 추가하지 않는다’와 같은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기부금으로 정부예산을 대체하지 않는다’는 조항입니다. 이는 정부예산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민간기부촉진을 논의하는 한국의 맥락에서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Q4. 민주주의와 ‘필란트로피’는 상충되는 개념인가?
번역서를 진행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부분이 이 책에서 언급된 ‘민주주의와 필란트로피의 관계’입니다. 관련된 문구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페이턴과 무디는 필란트로피의 ‘개척자적 역할’과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이 같은 역할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중략) ‘민주주의는 필란트로피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적인 현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 선언 같아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좀 길지만 5장’필란트로피적 가치와 윤리’의 다원주의 부분을 보시면 감이 잡힐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의회민주주의로 한정될 필요가 없다.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도 있기 때문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내용은 공적 책임에 집중되어 있다. 페이턴에게 필란트로피는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것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의 미래는 그 사회의 필란트로피적 전통이 갖는 활력에 달려 있다. 건강한 필란트로피 분야 없이 민주주의가 번창하기란 불가능하다.’ 민주사회에 존재하는 결사의 자유는 필란트로피 분야의 단체들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 단체들의 목표에는 공공선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 같은 목표는 단체들이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즉, 국가가 (다수결로, 혹은 단일하게) 결정한 사회문제의 해석과 다른 (소수자의) 해석과 그에 따른 처방을 자발적인 헌신을 통해 구현한다는 점이 직접민주주의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정책에 대한 권리로서의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다수결에서 소외된 의견이나 계층에 대한 보호를 민간영역에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따르되 소수가 배제되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면, 복지국가에서 필란트로피가 왜 필수적인 사회제도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덧붙이는 말.
이 책에 담긴 많은 내용을 모두 정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유럽의 맥락과 유럽의 학자들을 인용한 학술적 부분은 바탕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지국가로서의 발전을 지향하는 한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요즘 꼭 함께 읽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자칫 편중되었던 필란트로피에 대한 논의가 시민사회 전반에서 폭넓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서 ‘이타주의자의 시대 저자 직강(원격강의, 6/16예정)’과 ‘이타주의자의 시대 소규모 세미나’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