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천의 글
-
공공은 어디까지 돌볼 수 있는가 – 다시 동자동의 골목으로
겨울이 올 무렵. 그 길에서는 아침마다 소주병이 얼어 죽었다. 밤이면 어린 애를 업은 여자가 땅속을 다니는 기차에서 반짇고리를 팔다가 시린 바람이 부는 가로등 아래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엄지만화방 옆에는 매일 부서지는 계단이 있었다. 일곱 개쯤 되는 계단을 오르면 교회의 옹벽 아래엔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옹벽 앞에는 건드릴 수 없이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래에 이불을 깔고 담요를 덮었다.
그 길에 들어서는 대형 빌딩 뒤편은 늘 지린내가 났다. 낮에는 악다구니를 쓰고 싸우던 부부가 해가 지면 포장마차를 끌고 12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역 앞에 모여 국수를 끓였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나는 거기 살았다.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18-37번지 장학고시원.
강산이 두 번쯤 변한 뒤에 동자동에는 자립공동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가 취재를 다녀와서 함께 밥 먹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무연고 공영장례가 자리 잡았다. 매주 보던 주간지에 ‘가난의 경로’라는 글이 실렸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동자동의 냄새를 떠올렸다.
내가 살던 창문 없는 방은 지금 어린이공원이 되어 있다. 거대한 주상복합 빌딩의 안락한 놀이공간이자 쉼터다. 땀내를 풍기며 휴게실에 모여들던 청춘들은 온데간데없다. 내가 떠나온 그 공간에 아직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동자동 18-37 장학고시원이 있던 곳 (2015년 촬영 / 이하나)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 한다는 변명은 통치의 방책이며, 외면의 핑계였다. 보편적 복지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에 당도했고, 복지는 골목마다 스며들었으나 꾸준히 실패하고 다시 도전한다. 저자는 성실한 현장 취재로 동자동의 돌봄이 왜 실패하는지 묻는다.
빈곤을 전시하고 고통을 증명하고 배고프면 줄을 서야 하는 이 체제에서 우리는 어떤 돌봄으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
행정은 힘이 세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개인의 역량과는 천지차이다. 그러나 행정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주 기초적인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존엄과 자존심, 인격과 자립 의지 같은 것들이다. 디디에 에리봉이 말했듯 노동과 빈곤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과 빈곤의 문제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그곳에서 탈출한 사람들이거나 관찰자들만 발언한다. 사회는 당사자들의 말을 얼마나 들어보았는가.
동자동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던 사내 (2015 촬영 / 이하나)몇 년 전 동자동 어린이공원 앞에 차를 대고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다 바위 앞에 자리 잡은 노숙인을 마주쳤다. 그이는 나에게 자기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주고 소주값을 보태달라고 했다. 나는 그의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눈 뒤 만 원을 건넸다. 빈곤을 증명하는 대가였다.
공공의 기부와 헌신은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타자화를 억제하고 개인으로 존엄을 지키며 공동체와 가느다란 실오라기 하나만 연결한 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희한하게도, 이 책은 추리소설처럼 흡입력이 뛰어나다. 문화기술지가 이렇게 가독력이 좋다는 것은, 흔히 보던 일상 뒤에 숨은 그림자의 실체를 하나씩 툭툭 꺼내 내 앞에 던져놓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이한 감정이입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의 심연을 까발려 버린다.
동자동은 한국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는 공동체다. 동자동의 남은 골목을 삭제하고 나면 인간존엄을 최후로 사수하던 이들은 어디로 갈까. 돌봄의 한계와 사회적 부조에 관해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널리 권하는 책이다.
같이 권하는 책
- <노랑의 미로> 이문영 / 오월의 봄 / 2020.5
- <빈곤 과정> 조문영 / 글항아리 / 2022.11
- <가난의 문법> 소준철 / 푸른숲 / 2020.11
-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 문학과지성사 / 2021.1
이하나 |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문화공동체 히응 대표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20대는 비정규직으로, 30대는 육아와 가사노동으로 보냈다.
2012년부터 마을 활동가로 시작해 2014년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을 지역시민사회와 함께 창립했다.
2018년부터 콘텐츠 기획과 제작, 교육사업을 진행하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 활동가, 대변인, 자영업자, 집필노동자로 산다.
『포기하지 않아, 지구』,『성남시의료원 설립운동사 2003-2021』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