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에 가해지는 족쇄는 어떻게 잠재력을 갉아먹는가
How Restraints on Nonprofits Undermine Their Potential
비영리단체에 가해지는 족쇄―비영리는 숭고해야 하며, 자본주의 개념과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의 편견―를 깨뜨릴 것을 주장하는 책. 이런 생각 때문에 나눔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명암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행동 방식을 도입하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론 Introduction
크든 작든 나눔의 존재는 인간 영혼이 가진 자비심의 사실적 증거이다. 나눔이 감정의 문제임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사실적 증거이다. 내면의 이러한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우리가 갖고 있는 시스템 자체도 나눔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을 전대미문의 규모로 사회 발전에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은 자선 시스템에 대한 관찰을 다룬다. 우리 시스템의 기반이 되는 비영리단체에 대한 통념을 없애 나눔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자선이 갖는 잠재력을 약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진 연민을 약화시키는 규칙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내 다른 부문에 주어지는 권리를 비영리부문에도 동일하게 부여하며, 자본주의 시스템의 활용을 비영리부문에도 동일하게 허용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우리 부문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유입되어야 한다면서도 그들이 월급을 많이 받으면 안 된다는 모순된 생각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애초에 시스템 전체가 비영리적이지 않다면 어떨까? 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이 책이 나눔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대의인 도전에 의미를 제공함으로써 비영리 부문 안팎에서 열정적인 움직임을 자극하기를 기대한다.
1장. 결과의 도덕성 The Morality of Outcomes
청교도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늘 죄를 저지르는 존재이며, 자선은 이를 속죄함으로써 영혼을 구원받기 위한 자기희생을 의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선 활동은 종교적인 측면의 선교 활동과 구분되기 시작했고, 현대에 와서는 록펠러와 같은 진보적인 자선가가 출현하면서 학술 연구나 다양한 사회 문제 해결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자선은 곧 자기희생이어야 한다는 청교도적 가치는 여전히 미국 자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과학에서부터 평등 및 인권의 이슈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청교도의 윤리를 해체할 때다.
현재의 상황은 낡은 관념이 교정되지 않고 노후화되어 생긴 결과이다. 청교도들은 가난과 고통이 불가피한 시대에 살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에 산다. 청교도 윤리는 우리에게 강력한 자선이라는 선물과 아울러 자본주의라는 다른 선물도 줬다. 우리의 임무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고 세계의 가장 긴급한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2장. 우리가 가진 잘못된 해석의 토대 The Foundations of Our Misconstruction
비영리 이데올로기의 오류는 자아는 타락했고 따라서 이익 추구는 죄악 이라는 청교도 교리의 근본적인 오류를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내 다른 부문들이 청교도의 비전에서 멀어진 반면, 비영리단체의 이데올로기는 그 비전의 보호를 위해 ~해야 한다 로 만들어진 가상의 신념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결과 보다는 그 가상의 세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을 둔다. 그것은 의무와 엄격한 규제 이외의 다른 수단을 상상하지 못한다. 따라서 비영리에 억압적인 규율을 강요함으로써 비영리가 가진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악영향의 정도를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러한 편견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가치에 기반한 보상을 금하지 않는다면 많은 MBA 졸업생들이 고통과 싸우기 위한 계획에 뛰어들어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다. 이윤 추구를 금하지 않는다면 수백 억 달러의 자금이 이러한 계획으로 흘러들어 거대한 프로젝트를 가능케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영리는 즉각적인 만족이 아닌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할 수 있고, 질병을 치료하고 빈곤을 해결할 아마존 같은 조직을 갖게 될 것이다.
아무도 자동차나 냉장고를 제조하는 일에 종교적인 신념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방암 근절이나 노숙자 발생 예방에 대해서는 달라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처방은 명백하다. 사람들에게 그가 기여한 가치에 따라 보수를 제공하고, 장기적으로 투자하며, 새로운 프로젝트와 꿈을 실험하고, 수요를 만들어내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해야 한다.
3장. 이런 질문은 이제 그만 Stop Asking This Question
영리 부문은 수익성으로 평가받는다. 이 수익성에 대응하는 비영리의 성과는 효과성이다. 이것은 기업의 수익에 비해 측정하기가 까다롭다. 대신에 비영리는 간접비로 대표되는 효율성으로 평가되곤 한다.
효율성을 부각함으로써 효과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성과가 간과된다는 점이 문제의 시작이다. 효율성은 선행의 양을 고려하지 않는다. 투입된 자금의 미래 가치 역시 고려하지 않는다. 프로그램은 탁월하지만 인기가 적은 대의를 지원하기 때문에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단체와, 프로그램은 형편없지만 인기가 많은 대의를 지원하기 때문에 자금을 쉽게 조달하는 단체가 있다고 하자. 이 두 단체의 효율성(=간접비 비중)을 측정하여 비교한다면 전자는 불이익을, 후자는 보상을 얻게 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효율성 측정은 단체가 필요한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을 막는다. 필요한 인재를 채용할 의욕을 꺾는다. 용기를 처벌하고 소심함을 보상한다. 장기적인 비전 추구를 방해한다. 수요를 만들어내기 위한 광고에 대한 투자를 금한다. 자금 투여에 대해 이익을 돌려주면 벌을 내린다. 효율성 측정은 이를 통해 우리가 그렇게도 세상에서 없애고 싶던 바로 그 고통을 제도적으로 고착화한다.
효율성 측정의 악영향을 종식시켜야 한다. 이를 위한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벌일 때다.
4장. 용기 Courage
자본주의가 경제적 부를 만들어내는 반면, 비영리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규제하는 메커니즘이 되면서 오히려 경제적 빈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우리가 더 큰 목표를 염두에 둔다면 비영리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말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중심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형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