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글

이 책에 대한 올바른 기대에 관하여

변화를 이끄는 이사회Boards that make a difference를 읽어보라고 굳이 추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영리 섹터의 이사회나 거버넌스라는 주제에 관한 한 이 책은 고전classic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논의가 이 책의 범주를 벗어나기도 어렵다.

고전이라서 그런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다는 사람은 만나기 어려운 것 같다. 마치 그리스 신화나 성서, 논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 책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도 별로 없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이 책 내용을 언급하는 말이나 글 역시 거의 없다.

그나마 이 책을 인용하는 글들 안에서의 이 책에 관한 평은 대개 이러하다. 좋은 책이기는 하지만 어렵고,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우리나라 비영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책. 이런 책을 어떤 독자가 읽어보고 싶을까. 게다가 일부 내용은 책 전체 맥락과 동떨어진 경우도 더러 있다.

요컨대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 많지 않고, 사전 정보도 제한적인데다, 그나마 있는 정보들도 책 읽기를 단념케 하거나 올바르지 않은 것도 있다.

나는 비영리 이사회나 거버넌스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다. 그래도 이 책을 번역 출간하느라 여러 번 읽어본 사람이기는 하다. 가장 먼저 이 책(한국어판)을 읽어본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이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지면 좋을 올바른 기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① 정책 거버넌스 도입, 분명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 존 카버John Carver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 이사회의 본연의 역할은 단체의 활동과 운영의 기본이 되는 방침 – 정책policy – 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전개되는 일련의 논리적 프레임워크를 통틀어 정책 거버넌스 모델policy governance model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정책 거버넌스 모델이 과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비록 좋은 모델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비영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실천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모델에 불과할까.

그런 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면이 정책 거버넌스 모델의 단점이라기보다는 모든 모델의 속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델이 현실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일반화한 것이기 때문인데, 그렇게 한 이유는 모델의 가정과 유사한 다른 현실에 적용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델을 다시 개별적·구체적인 현실에 펼쳐놓기 위해서는 별도의 실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책 거버넌스 모델 도입을 고려하는 상황이 실천을 어렵게 만든다.

만일 비영리 단체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상황이라면 정책 거버넌스 모델을 도입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두꺼운 이유는 모델의 개념과 도입 과정에서 해야 할 일들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지, 책이 어렵거나 내용이 방대해서가 아니다. 이 책이 제안하는 정책 거버넌스 모델에 따라 이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이사들을 찾아 모시고, 이 분들에게 정책 거버넌스 모델에 대해 충분히 교육하며, 이 모델에 따라 수립된 정책에 의하여 단체가 운영되도록 하면 정책 거버넌스는 쉽게 운영될 것이다.

그러나 정책 거버넌스 모델이 고려되는 상황은 대체로 이사회를 운영하는 기존 방식의 대안으로서 이를 고려하는, 즉 이사회를 운영하는 기존 방식을 정책 거버넌스로 바꾸려는 경우일 것이다. 단체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경우와 달리, 이 경우에는 이사(회)와 이를 운영하는 특정한 방식이 이미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이사들에게 정책 거버넌스를 설명하고 반대 의견을 설득하면서 기존 운영 방식 중 일부를 없애거나 바꿔나가면서 정책 거버넌스로 이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정책 거버넌스로의 이행이 쉽지 않은 이유가 이 모델이 지나치게 이론적이라거나 현실과 동떨어져서가 아니다. 모델이라서 그렇고, 모델이 구현되는 상황 때문에 그렇다.

물론 모든 모델이 구체적·개별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어떤 원리나 가설에서 출발한 모델로서 현실에서 입증되는 모델 – 연역적 모델 – 도 있다. 그러나 정책 거버넌스는 – 이 책에서도 밝히듯 – 바람직한 거버넌스로 여겨지는 여러 구체적인 사례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일정한 원리에 따라 추상화하여 하나의 모델로 단순화한 것이다. 즉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요컨대 ‘정책 거버넌스는 실천하기 어렵다’는 주장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 모델 – 시스템, 프로그램 – 을 실제로 개별적·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다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는 것은 어떤 모델이든 마찬가지다.

② 정책 거버넌스는 이사회 운영의 만능 치트키가 아니다

정책 거버넌스를 도입하면 이사회 운영에 관한 많은 문제가 해결될까.

분명히 해결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사회의 역할과 사무국의 역할 간의 모호한 경계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늘 고민이던 단체는 정책 거버넌스 모델을 도입함으로써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을 둔 명문화된 경계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사회 혹은 일부 이사가 사무국에 대한 우월감을 표현하면서 사무국을 존중하지 않거나, 어떤 결정이 단체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것인 줄 알면서도 이 결정을 미룬 채 덜 중요한 실무적 사안에 과도하게 파고들거나, 이사들이 이사로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이에 대한 고민 없이 이사회 내 주도적인 인사의 결정 등에 무조건 따르기만 한다면, 정책 거버넌스를 표방하거나 형식을 흉내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정책 거버넌스 모델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뛰어난 거버넌스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정책 거버넌스 자체가 탁월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458쪽)

모델은 일련의 원칙을 말하므로 특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채택하기에는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드는 대안일 수도 있다. 이사회 운영에 관하여 전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어떤 새로운 모델 – 시스템, 프로그램 – 을 도입·시행하기보다는 해당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소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③ 정책 거버넌스는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긴 환경 때문에 적게 걷는데, 이는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루에 몇 걸음을 걸어야 할까? 1만 보? 8천 보? 아니면 6,374보? 그저 많이 걸을수록 좋은가?

사람들은 기준에는 합리적인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틀린 믿음은 아니다. 그런데 때로는 기준의 엄밀한 타당성보다는 기준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경우도 있다. 6천 보든 8천 보든 1만 보든, 잘 움직이지 않는 지금보다 더 움직이도록 하면서도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기준을 세우고 꾸준히 이를 실천하면 된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비 독자는 이 책에서 바람직한 거버넌스를 구축하기 위해 충족해야 할 구체적인 기준을 찾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할 뿐 그것을 구체적으로 – 예컨대 1만보 이상 – 제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이사회와 사무국의 역할은 각각 어떻게 나뉘어야 하는가? 이사회는 크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직접 결정하고 나머지는 사무국에 위임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직접 결정할 사안이며, 무엇이 사무국에 위임할 사안인지에 대해서 이 책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뚜렷한 경계가 꼭 필요하다고 말할 뿐이다(“튼튼한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 (421쪽)). 경계를 정하는 원칙은 있다. 이 경계가 사무국을 충분히 통제하면서도 사무국의 자발적인 자율성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 그 경계가 어디인지는 이사회가 단체의 상황이나 단체 운영에 관한 우려 등을 감안하여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 이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이사회는 자신들에게 단체의 사명과 목적을 위임한 위탁자moral ownership를 충실히 대변하고 이들과 연결되고자 노력하는 이사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소득 수준, 지역, 성별, 그밖에 다른 특징들이 위탁자와 비슷하도록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그 좋은 방법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방법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탁자와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이사들의 노력이다.

지금까지 정책 거버넌스는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 과장이 있다는 점을 말했고, 이어서 정책 거버넌스가 만능 치트키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방향을 제시할 뿐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정책 거버넌스를 비법이나 매뉴얼이 아니라 바람직한 거버넌스를 향한 원칙이자 사고방식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책 거버넌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해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읽어나가길 바란다.

물론 정책 거버넌스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비영리 중에 정책 거버넌스를 표방하며 설립된 단체, 종전의 거버넌스를 정책 거버넌스로 이행한 단체의 사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며,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예상해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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