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변화를 이끄는 이사회를 추천하면서, 나는 이 책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모델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거버넌스를 실제 도입하여 우리 단체의 현실에 맞게 조정할 때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힐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국내에서 정책 거버넌스를 표방하거나, 종전 거버넌스를 정책 거버넌스로 이행한 사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이를 어떻게 대처할지는 예상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정책 거버넌스로 이행할 때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3가지를 상정하고, 각 경우에 대한 대처 방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① 현행법상 이사회 결의 사항으로 강제되는 사안의 처리
이사회가 사무국에 위임하기로 결정한 사안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현행법에서 이사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정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사무국에서 올라온 이러한 의안에 대해 무검토 승인rubber-stamping을 하라고 말한다(365쪽). 이사회의 거수기 역할이 이럴 때에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승인의 결과에 따르는 막중한 민·형사상 책임을 이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경우에도 무검토 승인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이사회가 별도로 논의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겠다.
② 정책 거버넌스를 단체의 기존 규범 체계에 맞추기
우리나라 법체계를 고려하면, 단체의 정은 가장 상위에 정관定款이 있고 그 아래에 내규가 있는 체계가 일반적이다. 내규에는 이사회의 결의로 제·개정하는 것(이하 ‘규정’이라고 하자)과, 사무국에서 이사회 결의 없이 제·개정하는 것(이하 ‘실무지침’이라고 하자)이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나라 단체들의 규범 체계는 대체로 ‘정관-규정-실무지침’의 위계로 구성된다.
단체가 종전의 거버넌스 체계를 정책 거버넌스로 이행하면서 규범 체계를 여기에 맞추려고 할 때, 이사회의 ‘정책’은 어느 위계에 두면 좋을까? 단체의 운영에 관한 가장 상위 규범인 ‘정관’에 담으면 될까? 그런데 정관에는 법률에서 정하는 필수기재사항을 담아야 하는데, 이중 일부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사회가 사무국에 위임하기로 결정한 사항에 해당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정관을 변경하려면 주무관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정책을 변경할 때마다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다. 따라서 이사회 정책은 ‘규정’의 위계에 두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이사회 정책을 ‘규정’의 위계에 두면 ‘정관’의 하위에 위치하게 된다. 이 때 정관의 내용과 이사회 정책의 내용을 비교하여 위계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정관과 정책에서 중복되는 내용은 어느 한 쪽에서 삭제하거나, 아니면 정관에는 보다 추상적으로, 이사회 정책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도록 조정해야 할 것이다. 법적인 필수기재사항으로서 정관상에 이사회 정책에서보다 구체적으로 규정된 것에 대해서는 그 처리 방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종전의 ‘규정’과 ‘지침’에도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다. 이사회의 정책과 중복되는 부분은 삭제하거나, 아니면 정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해석한 것을 지침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③ 이사회와 사무국의 완전한 역할 분리
이 책에서 카버가 “튼튼한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421쪽)”고 했듯, 정책 거버넌스 모델은 이사회의 역할(거버넌스governance)과 사무국의 역할(실행Execution)이 완전히 분리될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단체에서 이 두 역할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대형 단체이더라도 대부분 설립 당시에는 몇 명 정도의 작은 규모로 시작했을 것인데, 이 경우 거버넌스만을 전담할 사람을 따로 두기는 어려운 여건이었을 것이며, 이런 여건에서 확립된 문화와 규범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체가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했다면 차츰 두 역할을 엄밀히 구분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체 중에는 규모가 작은 곳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대부분의 단체는 거버넌스를 담당하는 구성원이더라도 실행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여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거버넌스와 실행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책 거버넌스는 단체의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일 때에만 도입할 수 있는 모델에 불과한가.
이 때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거버넌스와 실행 두 역할을 겸하는 구성원이 스스로 이 두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거버넌스에 해당하는 일인지 실행에 해당하는 일인지를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적절한 역할을 결정하여 일의 수행 방식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멀티플레이는 어려운 일로서 누구나 잘할 수 없으며, 특히 어떤 일에 집중함으로써 성과를 극대화하고 전문성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누구나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할 때가 있고(예를 들어, 관리자인 동시에 실무자로서),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게다가 거버넌스 역할은 단체의 목적과 사명을 지향하며 폭넓은 사고를 요하므로 개인의 성장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