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금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을까요? 미국의 Philanthropy New York이라는 기관에서 2008년에 정리하여 발표한 글에 미국의 유명한 혁신사례들 중 민간공익재단의 후원으로 가능했던 일들을 정리한 것이 있습니다. ‘필란트로피란 무엇인가’의 공동저자인 마이클 무디 교수가 참여하여 묶은 ‘Philanthropy Reader’에도 소개된 글입니다. |
Key contributions to society by philanthropic foundations
Philanthropy New York, 2008 [원문 바로가기]
재단은 종종 국가나 민간에서 하지 않을 방식의 새로운 문제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한 프로그램에 자금을 댐으로써 한 사회의 연구기획기구의 역할을 한다. 다음은 지난 100년간 재단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은 유명한 혁신사례들의 목록이다.
공공도서관
오늘날 미국의 도서관 시스템은 거대하다. 16,000개의 도서관은 연간 15억회의 방문자를 맞이한다. 신문과 연구자료에서부터 성인과 아동을 위한 소설, 오디오/비디오 자료와 인터넷 연결까지 다양한 자료를 갖추고 있으며 대중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채 한세기도 되지 않는 과거에 책과 교육자료에 대한 평등한 접근이라는 아이디어는 혁명적이고 논쟁적이었다. 그 비전을 세우고 행동을 한 사람은 앤드류 카네기었다. 그는 1900년대 초반에 전 세계 2,500개 이상의 도서관 설립을 도왔다. 도서관은 카네기의 ‘자기발전'(Self-betterment)라는 필란트로피 중심 철학의 발현이었고 카네기나 뉴욕의 카네기 회사에 요청한 거의 모든 커뮤니티가 지원을 받았다. 1920년대에 카네기의 도서관 기부금은 39백만 달러(약 420억 원)를 넘어섰고, 미국 내 1,406개 커뮤니티에 1,679개의 공공도서관 건립을 이끌었다. 오늘날, 이 도서관들은 국가 공공 도서관 네트워크에 통합되어 있다.
황열병 백신
20세기 초기에 보스톤과 볼티모어는 총 50건의 황열병 확산을 경험했다. 찰스톤과 뉴올리언즈에서 수천 수많이 사망했고, 희생자은 밤낮으로 묻혔다. 이 질병을 근절하기 위하여 1915년 록펠러 재단은 향후 30년간 백신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했다. 재단의 의사와 과학자들은 많은 도시와 남아메리카, 서아프리카 정글들을 여행했다. 많은 록펠러 연구자들이 이 업무 수행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의 노력은 1936년 첫 백신 개발로 보상받았고, 1938년에는 1백만 명 이상이 백신을 맞아 이 중 90%가 면역이 생겼다. 2차대전 중에는 3,400명분 이상의 백신이 생산되어 보건기구와 연합정부에 무료로 배포되었다. 1951년에는 재단 과학자 막스 타일러가 황열병 백신 업적으로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당뇨병을 치료하는 인슐린
인슐린을 발견하기 전, 당뇨병 환자들은 극단적인 섭식 제약과 회복가능성이 거의 없는 치료계획으로 고통받았다. 1916년 아직 창업 초기였던 CCA(Carnegie Corporation of America)는 나다니얼 카터박사로부터 당뇨병 치료를 위한 프로젝트 제안을 접수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산타바바라의 캐티지 병원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병원의 이사들은 이 연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병원 부근에 연구실 설립에 자금을 지원했다. 포터박사는 3년 후에 사망했지만 포터 메티볼릭 클리닉(Potter Metabolic Clinic)의 후임자인 윌리엄 산수스박사는 인슐린 추출 프로세스 개선연구를 총괄했다. 이는 1922년 미국 내 성인 환자를 위한 첫 인슐린 관리로 이어졌다. 51살의 당뇨를 앓던 남성환자는 인슐린 처치로 90세까지 살았다. 첫 어린이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한 토론토 대학 연구진과의 협업을 통해 그해 하반기에 인슐린의 대규모 생산이 시작되었고, 1923년 말 인슐린은 약국에 진열되기 시작했다. 당뇨는 여전히 전세계적인 문제이지만, 인슐린은 수백만의 목숨을 살리고 생명을 연장해온 것으로 추산된다.
로켓과학
로켓과학의 개발로 인해 우주탐사와 위성통신과 같은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위성통신은 우리 일상에서 수많은 방식으로 관련되어있다. 비록 나사의 프로그램은 정부가 운영하지만, 초기에는 로켓을 쏘고 인간을 우주에 보낼 수 있게 하는 기술을 위한 실험과 발견은 민간 재단의 돈으로 진행되었다. 진공상태로 여행할 수 있는 로켓을 구축한 다음, 물리학 교수인 로버트 고다르는 스미스소니안 연구소의 호지킨스 펀드로부터 높은 고도 버전의 로켓을 만들기 위해 5,000달러라는 작은 지원금을 받았다. 그는 1926년에 개발에 성공하여 로켓을 2.5초만에 41피트 상공으로 발사했다. 그 다음의 발사들은 이웃들과 기자들의 주목을 끌었는데, 로켓개발 노력을 우스갯거리로 여겼다.
유일하게 헨리 구겐하임만이 그 노력을 진지하게 평가했는데, 구겐하임은 고다르의 아이디어 현실가능성에 대해 찰스 린드버그에게 자문을 구했고 결국 린드버그는 구겐하임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구겐하임의 아버지는 광산업으로 부를 쌓았는데, 고다르의 연구를 4년 이상 후원했다. 다니엘 플로렌스 구겐하임재단은 그 후 11년간 지원해서 미국이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는 나라가 될 수 있게 했다.
자궁경부암검사
오늘날, 자궁경부암은 조기발견하여 치료하기 가장 쉬운 암 중 하나다. 1940년 이전에는 여성 사망률이 가장 높은 암이었는데 이는 진단이 복잡하고 비쌌기 때문이다. 1923년 조지 파파니콜로 박사는 자궁경부암의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이 발견을 보고했지만 병리학자들은 암이 개별 세포들로 추적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음으로 인해 묵살했다. 하지만 1941년 커몬웰스 펀드는 “매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1,800달러의 연구기금을 제공했다. 파파니콜로는 이후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때, 커몬웰스 펀드가 나타났다”고 회고했다.
이 지원을 통해 파파니콜로는 박리 세포학으로 생체검사보다 훨씬 앞서서 암세포가 되기 전의 비정상 세포를 밝혀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 효과는 빠르고 엄청났다. 그리고 1960년에 미국 암협회는 6백만의 미국여성이 이 검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자궁암으로 인한 사망이 그 전보다 반으로 줄었다고 추산했다. 팜스미어(Pap smears)라 불리는 이 방법은 현재에는 자궁경부암을 추적하는 기본적인 검사기술이 되었다.
소아마비 백신
1994년 12월, 팬아시아건강기구(Pan America Health Organization)는 소아마비가 서반구에서 근절되었다고 발표했다. 그 전에는 세계는 20세기의 첫 50년간 유럽, 북아메리카, 호주, 뉴질랜드에 확산된 소아마비로 인한 사망과 장애의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1948년에 조너스 소크박사가 사라 스케이프 재단으로부터 35,000달러의 지원금을 받아 피츠버그 대학에 바이러스 연구실을 설립했다.
1952년에 이제는 유명해진 소크백신이 개발되었고 1955년 4월 12일, 생명을 구하는 발견이 세계에 발표되었다. 1950년대 중반 백신의 폭넓은 사용으로 척수성 소아마비는 많은 선진국에서 극적으로 감소했다. 1988년 WHO, 유니세프, 로터리 재단이 이끄는 소아마비 근절을 위한 국제적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노력은 연간 소아마비 진단수를 99%까지 낮춰서 1988년 360,000건이 2006년 1,997건으로 줄었다. 현재 소아마비는 나이지리아, 인도,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4개국에서만 유행병으로 남아있다.
고속도로의 하얀 줄
십대의 토마스 에디슨과 동업을 통해 요하네스 도르(John V. N Dorr)는 금속공학 분야에서 혁신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40년 그는 화학과 금속공학분야만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본인 이름의 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1950년에 그는 일상 문제에 대한 더 간단한 해결책으로 옮겨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르박사는 야간이나 비, 눈이나 안개로 시야가 흐려졌을 때, 운전자들이 고속도로의 백색선을 넘나드는 상황을 상정했다. 그는 이것이 수많은 사고로 이어지고 고속도로 바깥 견각에 백색 선을 칠하는 것이 생명을 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뉴욕, 코네티컷의 고속도로 기술자들에게 커브와 경사가 있는 고속도로의 구간들에서 그의 이론을 검증하도록 납득시켰다.
초기의 결과는 매우 확실했다. 그러나 고속도로 담당자는 마일당 겨우 150달러가 들고 실제 효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적 시선을 받는 선긋기라는 도르의 제안을 따르길 주저했다. 도르재단은 그 명분을 강하게 주창했고, 이후 오하이오, 뉴저지와 로드아일랜드에서 후속적으로 긍정적 연구( 이중37%의 사망,상해감소결과도 있었다)로 인해 고속도로 바깥 견각 선은 일반적으로 수용되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견각 선을 칠하는데 정부기금이 사용되지만,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는 모든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발견을 실행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도르와 그의 재단에게 빚진 셈이다.
공공 방송
1964년 12월, 교육방송국의 장기자금조달에 대한 첫 국가 콘퍼런스는 비상업 교육 텔레비전의 역할에 대한 연구가 요청되었다. 카네기 기업은 15개 회원을 둔 국가 위원회의 작업에 재정지원을 하기로 했다. 그 결과 “Public Television: A Program for Action”이라는 획기적 보고서가 1967년 1월 26일에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 Public Television “이라는 말을 대중화시키고 관련 의제를 위한 연방정부의 활동을 법제화하는 캠페인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67년에 공공방송법(The Public Broadcasting Act) 이 10개월만에 제정되었다. 민간의 비영리로서 공공방송회사(Corporation for Public Broadcasting. CPB)를 인가하였다.
이 법은 시설 자금을 지원하기 보다는, 공공방송회사를 통해 공공방송을 운영했다. 공공방송회사는 이전에 있었던 국가 교육 텔레비전 시스템(National Educational Television system)과 협력하였으나 1969년 공공 방송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공공방송회사(CPB)와 포드재단에 위임된 공공 전파 연구는 1968-1969년 동안 수행되었고 국가 공공라디오 설립으로 이어졌다. 공공 라디오 시스템은 공공방송법에 제정된 조항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 거의 89만 명의 사람들이 공공텔레비전을 보는 것으로 추산된다.
쎄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
일반적으로 쎄써미 스트리트는 1,600만 명의 시청자가 보고, 세계에서 가장 넓게 방영되는 어린이 시리즈이다. 지금은 자체예산으로 운영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초반. 국가 교육 협회는 유치원교육을 모든 어린이가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승인했다. 그러나 학교 예산은 이런 프로그램에 충분하지 않았다. 1966년 뉴욕의 카네기 회사는 유치원 교육에 텔레비전 사용의 현실가능성 연구에 동의했다. 포드 재단, 공공방송회사와 미국 교육부는 6백만 달러 이상을 어린이 텔레비전 워크샵 시작에 후원하기로 약정했다. 1966년 11월 10일 쎄서미 스트리트 첫회가 방영되었고 첫 주에 1.5백만명이 시청했다. 오늘날 쎄서미 스트리트는 가장 성공한 텔레비전 벤처로 이해되고 있고 120개 이상 나라에서 볼 수 있다. 7,700만명의 미국인이 어린시절 이 쇼를 본 것으로 추산되며 118번의 에미상을 받았다.
긴급 911
국가위기 의료대응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은 1966년에 시작되었다. 국가 안전 법률이 앰뷸런스와 홍보, 훈련 프로그램에 예산을 승인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70년대 초에 로버트 우드 존슨 재단이 32개 주에 지역 긴급 의료서비스를 위해 44개 지원을 한 것에 의해 확산되었다. 이 재단의 프로그램은 지역화된 시스템적 접근이라는 개념을 보여주었다. 이 지원사업을 따라 연방정부도 지원사업들을 진행했고, 그 결과 오늘날 전국적 긴급 911시스템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