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대한민국이 제국주의에 침략을 당한 나라 중 가장 빨리 독립을 되찾게 된 데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3.1 만세운동과 무장투쟁, 해외에서의 외교 등이 조망되는 가운데, 그 자금을 댄 민족자본가의 기부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기부역사를 만들어 온 기부영웅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동화약품을 이어받은 윤창식, 그리고 백산무역을 설립한 안희제까지, 지금부터 3인 3색의 흔적을 따라가 보시죠.

민족자본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 유일한, 윤창식, 그리고 안희제

이미지 출처 : utoima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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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행동

유일한(1895~1971)

유일한은 (중략) 그가 힘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사업들에 대해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애국은 실천이지, 말이나 선전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은 『유일한의 생애와 사상』에서 유일한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가 기업가로서 훌륭한 일을 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미국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그가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는 동포를 돕기 위해 유한양행을 세운 일, 그 회사를 매우 투명하게 운영한 일, 유한공고를 설립하는 등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한 일, 그리고 그 회사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모두 환원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만 기업가로서만 애국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한 다른 활동들은 그보다는 덜 알려져 있습니다.

3.1운동 직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 총 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에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표현하는 결의문] 작성의 책임을 당시 미시간대 재학 중이던 24세의 유일한이 맡았습니다. 또한 2차대전 때 미군의 대일(對日) 활동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 국내 후방 침투 작전의 특수요원으로 참여하였지만, 생전에 자신의 입으로 이런 일들을 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1938년, 유한양행의 로스앤젤레스 출장소 설립을 위하여 미국에 와 있던 유일한은 2차 대전 발발로 귀국길이 막히자 미군전략정보처(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때 OSS가 요원을 훈련시켜 적진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조선에 비밀리에 침투시키려던 계획, 즉 냅코(Napko) 작전에 요원으로 지원하여 나이 50세에 작전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습니다. 작전 개시에 관한 맥아더 장군의 승인이 늦어지고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하여 작전이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작전이 실행되었다면 낙하산을 타고 적진 후방에 떨어지는 50세의 요원에 관한 전설이 역사에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침착하게 의(義)를 취하기

윤창식(1890~1963)

비분강개하여 죽기는 쉬우나, 침착하게 의를 취하기는 어렵다. (慷慨憤死易, 從容就義難.)

보당 윤창식은 평소 신념을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한 보당은 조선인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면 먼저 경제적으로 자립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에 걸쳐 스스로 사업을 일구고 자본을 축적하는 자본가의 길을 묵묵히 걷는 한편으로 조선의 경제자립 운동에 헌신하며 독립운동과 빈민구제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보당은 1915년 조직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稧)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부터는 보린회(빈민에 대한 종합 복지사업을 하던 단체), 1927년부터는 신간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등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 가난한 동포들을 지원하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보당은 1930년대 중반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인수를 제의받게 됩니다. <부채표 활명수>로 잘 알려진 동화약방은 독립운동가인 민병호가 1897년 설립하였으며, 그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민강이 초대 사장을 지낸 회사로, 1919~1922년 사이 상해임시정부가 활동자금 마련과 국내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락을 위하여 설치한 서울연통부의 거점 역할을 수행한 민족기업입니다. 이 동화약방이 1931년 민강 사장의 사망 이후 경영난을 지속하자 동화약방에서는 이를 이어받을 적합한 인물로서 보당에게 인수를 제의하게 된 것입니다. 보당은 이를 신중히 검토하여 동화약방을 인수하였고 1937년에 사장으로 취임하여 동화약방의 경영을 정상화하였습니다. 동화약방은 오늘날의 동화약품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회실험가

안희제(1885~1943)

백산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는 1920년대 부산에서 설립된 민족기업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상당 부분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산은 1916년에 고향인 경남 의령의 전답 2천마지기를 처분한 자금으로 부산에 백산상회를 개인 무역상으로 설립하였습니다. 백산상회는 이후 1917년에 자본금 14만원의 합자회사로, 1919년에는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 백산무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설립 당시 민족회사의 자본금 중에는 가장 큰 규모라고 합니다.

상회는 본업인 무역업 외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그 지점망을 이용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연락망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설사 일제에 발각되는 경우에도 무역상임을 내세워 존재를 숨길 수도 있었습니다. 백산을 비롯한 대동청년단(국권회복 운동을 하던 비밀결사 중 하나) 단원들은 상회의 이러한 이점에 주목하여 전국 각지에 상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백산은 양정의숙 경제과를 졸업하였으며 졸업 전에 이미 부산 구포저축주식회사에 주주로 참여하는 등, 많은 사람과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주식회사 제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립운동과 각종 사회활동을 하면서 쌓은 인맥을 주주로 참여시켜 대규모 자본을 조달할 능력을 실제로 갖추기도 하였습니다.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 백산무역은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산에게는 민족자본가로서의 면모 외에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 사회실험가로서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백산무역 이전부터 백산은 다양한 교육사업과 장학사업에 매진하였고, 부산지역에서 주택난구제기성회 등 여러 사회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언론인 또는 언론사 경영자로서도 활동하였습니다. 1928년 백산무역 해산 이후에는 협동조합 운동에 매진하였으나, 그가 참여했던 협동조합 운동 단체가 1931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면서 민족자본가로서, 협동조합 운동가로서 모두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백산은 다시 다른 일을 시도하였습니다. 바로 만주로 이주, 대종교에 귀의하면서 옛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인근에 발해농장이라는 협동농장을 경영하는 일에 착수한 것입니다. 하지만 백산은 1943년 일제에 의한 대종교 탄압 사건(임오교변) 때 검거되어 안타깝게도 향년 59세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그가 살아남았다면 발해농장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을지, 아니면 또 어떤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였을지 궁금해집니다.

 

참고문헌

  • 권대웅. 2013.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설립과 경영. 『백산 안희제의 생애와 민족운동』(백산안희제선생순국70주년추모위원회 편). 161~194쪽. 선인.
  • 김형석. 2016. 『유일한의 생애와 사상』. 올댓스토리.
  • 예종석. 2009. 『활명수 100년 성장의 비밀』. 리더스북.
  • 오미일. 2014.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푸른역사.
  • 전병길. 2015.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 생각비행.
  • 조성기. 2005. 『유일한 평전』. 작은씨앗.
  • 블로그. 민족을 위해 내려진 숙명의 이름 – 유일한 (https://blog.naver.com/nonepapa/220239466161)
  • 블로그. 2018.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화신 (https://jolggu.tistory.com/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