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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함께 사는 삶을 고민해야 할 시점

몇 년 전,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 「학벌주의가 심해졌으면 좋겠어요」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신은 노력해서 명문대에 진학했으니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접을 덜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취업과 연봉은 대학서열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 받아야 하고 대학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직업군 자체가 분류되길 원한다.”라고 말했다. 극렬한 입시경쟁에서 성공한 한 명문대생의 사회 인식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 명문대생의 ‘어그로’ 정도로 끝났어야 했던 그 인식은 이제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부터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이준석의 당대표 선출’까지 이 모든 흐름은 ‘공정의 문제’로 둔갑하였다. 이러한 흐름의 반대 논거로 등장한 책이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능력주의의 폭정(Tyranny of Merit)이다.

# 능력주의

능력주의란 성별, 인종, 종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기회가 동등하게 제공되고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능력주의를 보편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대남’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20대 남성들이 능력주의에 동조하고 있다. 2021년 진행된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결과 ‘고졸자-대졸자간 임금 격차’에 대해 청년 남성 43.1%, 청년 여성 27.5%, 50대 남성 14.5%, 50대 여성 17.2%가 공정하다고 응답했고, ‘명문대-비명문대 출신 간 임금 격차’에 대해 청년 남성 40.6%, 청년 여성 23.7%, 50대 남성 14.8%, 50대 여성 12.2%가 공정하다고 답했다. 이를 통해 50대보다 청년이, 청년 여성보다 청년 남성이 능력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관련기사 :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④ 세대가 아니라 세상이 문제다].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능력주의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듯, 기성세대는 고도성장 시기와 맞물려 열심히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 사회에 살았다. 그들은 노력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사회적 계층을 이동시켰다. 하지만 오늘날 청년세대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드라마틱한 신분상승은 어렵다. 능력주의 신화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는 대물림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SAT 시험은 누구나 응시할 수 있지만, 명문대에 진학하는 학생은 고소득층 가정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많은 돈을 투자해 과외나 컨설팅으로 SAT 시험에 대비한다면 그만큼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장학재단의 ‘2019년 2학기 소득구간별 국가장학금 신청 현황’을 보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재학생 절반의 가구소득이 고소득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자는 실제로 명문대 친구로부터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김주영 선생님’ 같은 코디가 실제로 존재하고 도움을 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저소득층은 더 이상 노력과 재능만으로 상류층이 될 수 없다. 능력주의는 이러한 불평등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진 자들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을 이루어냈다고 여기게 만든다.

기회 균등’이라는 수사는 규칙을 지키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구호로 요약되었다. … (중략) …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 상황 상 사회적 상승은 결코 쉽지 않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미국인은 대개 가난한 성인이 된다. … (중략) … 미국인의 70%는 ‘가난한 사람이 자력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유럽인은 35%만이 그렇게 여긴다. 이런 사회적 이동성 관련 믿음은 미국이 주요 유럽 국가들에 비해 왜 그처럼 복지제도에 소극적인지 설명해준다.

– 49-50p.

# 승자의 우월감, 패자의 모멸감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성공했다는 생각은 승자를 우월감에 도취하게 만든다. 그 결과, 패자에게는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이 가해지기 쉽다. 이는 비단 승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패자 스스로도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모멸감에 빠지게 만든다. 이는 경제적, 사회적 보상으로 이어진다. 승자는 더 많은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지위를 약속받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고, 패자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를 수용하며 절망한다. 그러나 많은 성공은 ‘운’에 의한 것이다. 고소득층 가정에서 태어난 것,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서 선호하는 것 등은 자신의 재능이나 노력과 크게 상관이 없다. 예로, 인기 스포츠 종목과 비인기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은 재능도 있고 엄청난 노력을 한다. 그러나 선호도에 따라 투자와 보상은 천지차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운’ 역할을 간과할 때, 저소득층이나 저학력층은 더 고통받는다. 그렇다면 ‘운’의 역할을 기억하며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 행운에 따른 혜택은 내게 당연히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 … (중략) …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200p.

# 샌델의 제안 : 겸손과 공동선

겸손은 내가 누리는 행복이 언제나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성공이 ‘우연에 의해 운 좋게’ 이루어진 것임을 알면, 승자의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의 미덕을 갖출 수 있다. 겸손은 갈라진 공동체를 다시 하나로 만들 수 있다. 공동체는 서로의 필요, 즉 공동선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게 만든다. 공동선을 논의하고 추구할 때 비로소 좋은 정치가 가능해진다. 성공이나 출세를 향해 ‘각자도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충족하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은 이러한 공동선에 관한 논의를 막는다. 포퓰리즘으로 횡행하는 능력주의 담론을 넘어,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타협하며 존중하는 ‘공동선 논의의 장’이 절실하다.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보다 사회적 상승에 보다 성공적인 나라라도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 349p.

박석원 | 숭실대 일반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졸

ENFJ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성격 때문인지 자꾸 부정의한 것, 불합리한 것이 눈에 보인다. 보고도 말하지 못하면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편. 편안하게 살라는 엄마의 말에 반대로 행동하는 청개구리이다. 사회복지사로 일했고 현재는 파트타임 노동자이자 수험생으로 살고 있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