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로 떠나는 도서관 여행

‘목적 독서’를 주로 하는 나에게, 일상에서 최고의 도서관은 내가 원하는 책을 신속하고 편리하게 빌릴 수 있는 곳이다. 이때 도서관은 조용한 창고다. 책 무더기 속에 다른 책에 한눈 팔지 않고 타깃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찾아 책을 쏙 빼낸다. 찾는 책이 있다면, 있어야 할 자리에 반드시 있을 것.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이와 같이 일상적인 루틴에서 가끔은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책이 내게 뚜벅뚜벅 걸어 오는 꿈을 꾸고, 도서관이 내게 말을 걸어 오는 상상을 한다. 일상에서 이러한 (가상의) 경험은 두렵고 불쾌하지만 여행에서는 기대되고 즐겁다.

그래서 어느날, 전주로 떠났다.

첫마중도서관에서 《여행의 이유》를

전주역에 내려 앞을 내다보며 걸었다. 이 길의 이름은 첫마중길. 마치 나 같은 여행자를 반갑게 맞으려는 듯한 이름이 붙었다. 배가 고팠다. 서울에도 여기저기 분점이 있는 콩나물국밥집에 들어가 배를 채웠다. 든든히 먹고 가게를 나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빨간 건물이 하나 보였다. 파란 가을 하늘을 가린 단풍잎처럼 선명했다. 이 도서관의 이름은 길 이름과 같았다. ‘첫마중 도서관’.

도서관 안 벽 한 쪽에는 이미 이 도시의 도서관을 돌아보고 떠난 여행 선배들의 소감이 잔뜩 붙어 있었다. ‘별점 테러’ 없이 별빛만이 반짝였다. 이번 여행을 기대하는 내 눈망울도 덩달아 반짝거렸다.

서가에 꽂힌 책들 중에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발견했다. 유명 작가가 정리해 주는 여행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번 여행의 방향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 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117쪽)

중국에 입국하자마자 추방된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하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해장국에 밥 말아 먹듯 책장을 훌훌 넘기며 읽었다. 여행 첫 책으로는 이만한 책이 없을 것 같다.

건지산숲속작은도서관에서… 《인간실격》을

전북대학교 뒤편에 펼쳐진 작은 산이 있다. 건지산이다. 이 산 안에 작은도서관이 있다고 했다. 피톤치드의 세례를 받으며 책을 읽는 기분을 기대하면서 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머릿속에 떠올린 풍경이 실제로 책상에 앉아 바라보는 것과 맞아 떨어지니 내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합성 사진이 아닐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숲속의 작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처럼 이 도서관에는 숲, 새, 환경 등에 관한 ‘푸른 책’이 많았다. 그런데 이 도서관이 내게 건넨 책은 뜻밖에 《인간실격》이었다. 중년 남자가 한가하게 함부로 혼자 여행을 다녀도 되냐고 눈을 흘기는 듯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 두려워합니다. 솜처럼 부드러운 것에도 상처를 입습니다. 행복에 상처 입기도 하는 것입니다. (69쪽)

책을 읽고 있으니 관리자분께서 “책을 보시다 보면 목이 아프실 수 있으니 독서대를 쓰시는 게 어떨까요?”라며 독서대를 건네 주셨다. 마음 써주시는 게 고마웠다. 읽은 책을 빼고는 모든 것이 푸근했다.

서학예술마을도서관에서 《날마다, 브랜드》를

전주한옥마을에서 전주천을 건너면 서학예술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에 도서관이 있었다. 어릴 적에 읽은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처럼 예쁘고 아담한 2층 건물 두 개가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보이는 풍경마저 액자에 넣은 예쁜 그림처럼 책, 소품과 어우러졌다.

왼쪽 건물은 음악에 관한 책을 둔 곳이었다. CD와 LP도 있어서 음악을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있었다. 오른쪽 건물은 미술에 관한 책과 갤러리를 둔 곳이었다. 담쟁이넝쿨이 이 건물 벽을 타고 오르고 있어서 특별히 ‘담쟁이동’이라고 불렀다.

미술의 한 분야, 디자인에 관한 책을 모아둔 책꽃이 가운데 뜻밖에 《날마다, 브랜드》가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출판 업무에도 “나눔북스”라는 브랜드가 있다. 하지만 ‘브랜드’라는 개념을 깊이는 이해하지 못하여, 책의 모양을 통일하기 위한 ‘디자인 가이드’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디자인은 브랜드가 고객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 브랜드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고 했다.

좋은 브랜드는 경쟁 브랜드와 싸워 이기는 방법을 궁리하는 대신, 브랜드를 통해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가치 있는 변화를 제안하고 그 약속을 잘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45쪽)

내가 담당하는 브랜드가 누구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에 대해 ― 문서에 적혀 있기는 하지만 ― 담당자로서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할 것 같았다.

책기둥 도서관에서 《책 산책가》를

전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전주시청에 들렀다. 시청 1층 로비에 선 기둥 사방을 빙 둘러 책장을 짜 그 안에 책을 넣어두고는 책기둥 도서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마법사도, 무림 고수도 아닌 머글들은 높은 곳에 꽂힌 책을 어떻게 보라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인테리어 효과는 만점인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회사 로비도 저렇게 꾸미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 같다.

책기둥 사이로 《책 산책가》라는 소설이 다가오더니 주인공 ‘칼’ 또는 ‘카를’을 내려놓았다. 편집자는 외국어 표기 규범에 맞게 ‘카를’이라고 적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번역가는 ‘칼’이라고 적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번역가의 의견대로 ‘칼’이라고 적되 책 맨 앞에 이견을 기록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독자는 잘 체감하기 어렵겠지만,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가게 되고,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서 옥신각신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이런 기록으로 두 당사자가 옥신각신한 흔적이 남으니 재미있었다. 그나저나 등장인물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해 소설 읽는 데 애를 먹는 나는, 주인공 이름을 확실히 익혀두고 읽기 시작하니 고마웠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칼 콜호프’씨는 나와 반대였다. 책을 많이 읽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는데 정작 실제 사람 이름은 잘 외우지 못했다.

칼에게 이런사람을 소설 주인공의 이름을 붙여 기억하는 습성이 생긴 이유는 소설 주인공들 외에는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5쪽)


필요한 책만 빠르게 찾아 나오던 일상 속 도서관이 ‘조용한 창고’였다면, 전주의 도서관들은 제각각 다채로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오는 ‘다정한 산책길’이었다. 의도치 않게 만난 책들 속에서 여행의 의미를 다잡고, 뜻밖의 상처와 위로를 받으며, 직업적 성찰과 소소한 웃음까지 선물 받았다. 목적 없이 떠난 길 위에서 도서관이 건넨 말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마음의 서가에도 새로운 문장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목적만을 향해 바쁘게 책을 뽑아 들 때마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 다정히 말을 걸어오던 전주의 알록달록한 도서관 풍경들이 가만히 귓가를 간지럽힐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