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거버넌스 모형을 소개한 책, 『변화를 이끄는 이사회(Boards that make a difference)』 소개

이제껏 비영리법인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거나 누군가 재산을 출연하였기 때문에 어련히 잘 굴러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선의에만 기대기에는 비영리법인의 설립과 운영을 둘러싼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2019년 통계를 기준으로 국내에 3만 5천 개 이상의 비영리법인이 등기되어 있는데, 규모에 따라서는 수조 원의 자산을 보유하는 법인도 있고, 비영리법인이 수행하는 사업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그 이해관계가 다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 비영리법인들의 경우에는 재원의 출처와 용처를 둘러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비영리’라는 외관을 앞세워 사실상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 이해관계를 위해서 복무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비영리법인 운영을 둘러싼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엄격한 회계처리 지침을 적용하고 정보공개의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 그리고 비영리법인을 감독할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고 비영리법인이 준수하여야 할 법규범을 강화하는 방안 두 가지가 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대책들은 모두 외부적 규칙(rule)들의 준수를 강제하는 것으로서, 비영리법인의 구성원들이 어떤 행위규범(standard)을 준수해야 하고, 바람직한 지배구조를 어떻게 형성해 나가야 하는지에 관한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비영리법인들이 스스로 지켜나갈 모범적인 행위규준을 만들어나가고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시민사회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집행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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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버의 책 『변화를 이끄는 이사회』는 비영리단체 내부에서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핵심적 조직인 이사회가 어떠한 책무를 부담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집행 조직과 어떻게 역할을 분담하여야 하며, 비영리법인의 설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소위 ‘정책 거버넌스(policy governance)’를 어떻게 운영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상세한 지침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비영리법인 내부에서부터 변화의 동력을 이끌어내고자 할 때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잘 짚어주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매우 유용한 가이드라인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비영리법인의 임직원들이 준수해야 할 법규범이 불명확하고, 관련 사례와 연구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현재 상황에서 『변화를 이끄는 이사회』의 출간은 매우 시의성이 높다. 이 책은 모두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비영리조직의 바람직한 지배구조가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제2장과 제3장에서는 이사회의 정책 수립기능에 관해서 다루고, 제4장부터 제8장까지는 비영리조직의 목표와 성과, 비영리조직의 이사회의 수탁자 책임과 이사회와 다른 조직들 간의 관계, 이사회 내 위원회에 관하여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제9장부터 제11장까지는 이사회가 수립한 정책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비영리조직을 운영하는 방안들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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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이끄는 이사회』의 주요 내용은 존 카버가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비영리조직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이론에 바탕을 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책 거버넌스’라는 모형이다. 정책 거버넌스란 말하자면 이사회는 정책을 설계하고 결정하는 기구로서 작동하도록 하고, 일상적인 사무는 최고운영자와 사무국이 처리하도록 하되, 이사회가 설계하고 결정하는 정책이 비영리법인의 목표 달성을 위해 장기적인 비전을 담고, 적합한 수단을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비영리단체들이 그 규모가 큰 경우에는 명망가 중심의 이사회가 조직의 비전에 부응하는 정책을 설계하고 관철시키는데 큰 관심이 없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사회와 사무국간의 역할 분담이 명확하지 않은 경향을 띠곤 한다. 이런 현실에서 카버의 ‘정책 거버넌스’ 모델은 조직의 규모나 성격을 가리지 않고 이사회가 본질적으로 담당해야 하는 핵심적 역할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음으로, 존 카버가 강조하는 이사회의 역할과 책임은 비영리·영리조직을 아울러 모든 조직이나 단체에서 발생하고 있는 소위 대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변화를 이끄는 이사회』에 따르면, 비영리법인의 이사회는 다른 집행기구들과 달리 자신들이 조직의 의사결정에 대하여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수탁자(trusteeship)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다만, 비영리법인의 경우에는 이사회가 의사결정의 책임자로서 누구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여야 하는지 불명확하다. 주식회사는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하도록 요구되는 경영진이 사익을 앞세우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 본인-대리인 문제의 핵심인데 반면에, 비영리법인은 경영진이 ‘무엇을 해야 한다’라고 정하기에 앞서 누구를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즉 ‘본인’ 또는 ‘주인’이 누구인지부터가 불분명 한 것이다. 이 책 제7장에서는 비영리법인의 이사회는 특정한 ‘본인’ 또는 ‘주인’을 위하여 법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각 비영리법인의 지향과 목표에 따라 설정되는 넓은 의미의 ‘도덕적 주인(moral ownership)’을 위하여 사회적 책임을 진다고 설명한다. 법적·경제적 관점에서도 비영리법인의 경영진이 책임을 부담하는 상대방이 출연자 또는 회원인지, 비영리법인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혜자들인지, 아니면 추상적인 ‘목적’ 그 자체인지에 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답이 명확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존 카버가 제시하는 ‘도덕적 주인’이라는 개념은 법적인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비영리법인의 운영 실무에서 고려해야 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포괄한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 현행법에 따르더라도 비영리법인의 이사회는 조직의 목표를 구현해 나가기 위한 정책의 결정권자로서, 이사회의 구성원인 각각의 이사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준수하여야 한다. 또 이사들은 조직의 이익과 자신의 사적인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여야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할 우려가 있다면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실의무도 부담한다. 특히, 비영리법인은 주식회사와 달리 주주나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이사들을 사전적, 사후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사들은 이론적으로 더 엄격한 의무를 부담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비영리법인의 이사들 스스로 자신들이 엄격한 수준의 주의의무나 충실의무를 부담하는 것으로 인식하지도 않고,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기 전까지는 의무 위반에 대한 별다른 내부적 통제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화를 만드는 이사회”의 출간은 비영리법인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유효한 돌파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제시한 정책 거버넌스 모델에 따라 비영리법인의 이사들은 조직의 장기적 비전을 위해서 목표를 설정하고, 정책을 집행하며, 주기적으로 성과를 평가하고, 자신들의 직무범위를 문서로 남기고, 최고운영자와 사무국과 효율적으로 업무를 분담하며, 제반 이해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엄격한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미국 내의 다양한 비영리조직의 이사회에서 활용되었던 목적정책들(제4장), 최고경영자의 역할을 통제하기 위하여 제시하였던 한계정책(제5장), 이사회의 업무 범위에 관한 가이드라인의 실례(제6장) 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국내 비영리조직들의 운영 실무에서도 구체적인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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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코로나 19의 발생을 맞아 시민사회에서도 연대와 공생을 위한 방향을 제시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 비영리조직들이 재원조달과 사업의 집행 모든 측면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적인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존 카버의 『변화를 이끄는 이사회』와 함께 조직의 목표를 재점검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사회가 어떠한 역할을 하여야 하는지를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지배구조의 정착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김정연 |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금융법과 회사법, 비영리법인·협동조합과 같은 여러 조직체들의 법적 문제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수조 속에 있는 청어인가 메기인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낯선 분야인 줄 알았는데 함께 갈 분들을 만나서 반갑고 설렙니다. 비영리부문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서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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