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도움과나눔의 최영우 대표님의 강의에서 유대인의 나눔전통에 대한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모금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기부를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필요한 일종의 ‘나눔의 윤리학’이랄까요. 종교적인 부분을 빼고서도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유대인에게 기부, 혹은 나눔이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정함으로서 당연한 의무로 여겨지는 것이었고, 두번째로 그러한 나눔행위에 레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 마지못해 아까운 듯이 주는 것
2. 줘야 하는 것보다 적게 주는 것, 그러나 기쁘게 주는 것
3. 요청을 받은 다음 주는 것
4. 요청을 받기 전에 주는 것
5. 수혜자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서 주는 것, 수혜자는 당신을 앎
6. 당신은 수혜자의 정체를 알지만 수혜자는 당신을 모르게 주는 것
7. 수혜자와 기부자가 서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주는 것
8. 수혜자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유대인의 체데카 개념에 대해 Tracy R Rich라는 유대인이 만든 사이트에 소개된 내용을 번역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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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zedakah: Charity
2006년 비즈니스위크지의 ‘50대 기부자’명단 중 15명이 유대인이다. 크로니클 오브 필란트로피의 2008년 ‘50대 기부자’ 리스트에도 16명이 유대인이다. 인구구성에서는 미국의 2%를 차지하는 유대인이 이 리스트에서는 3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 저널에서 진행한 2003년 조사에 따르면 연간 100억불 이상을 기부하는 ‘초거액 기부자’의 24.5%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유대인의 기부는 유대인을 위한 곳에만 집중되지도 않는다.
“Tzedakah’의 의미
체다카는 영어로는 “Charity(자선)’으로 해석되는 히브리어이다. 원조, 가난한 사람이나 가치 있는 일에 도움이나 돈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체데카의 본질은 자선과는 많이 다르다. ‘자선’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위해 하는 자비나 관용, 너그러운 행동을 말한다. 그러나 “체다카’는 Tzadei-Dalet-Qof라를 히브리어로 올바름, 정의, 혹은 공정함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유대주의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하는 것을 관대한 행동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단지 정의롭고 옳은 일로서 의무의 이행이다.
체다카의 의무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하는 것은 유대주의에서 의무이다. 이 의무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어떤 현자들은 체다카가 십계명 모두를 합한 만큼의 높은 개념이며 이를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아마도 과장되었겠지만, 이는 유대인의 관념에서 체다카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체다카는 죄로부터 사함을 얻을 수 있는 세가지 행동 중 하나이다. High Holiday Liturgy는 신이 지은 죄에 따라 판결을 적는데 회계, 기도, 그리고 체다카가 그 정도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 법에 따르면,우리는 수입의1/10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이는 보통 세후 실질 소득의1/10으로 해석된다.세금납부는 체다카 의무실행으로 여겨지지 않는다.실제 세금수입의 많은 부분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사용된다 하더라도 말이다.공공의 도움을 받거나 최저생활 경계의 사람들은 기부를 덜하긴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반드시 해야 한다.그러나 스스로가 공공의 짐이 될 정도로 기부해서는 안된다.
체다가 수행의 의무는 돈을 가난한 사람, 의료시설, 유대교교회, 교육시설에 기부함으로써 이행될 수 있다. 이는 법적 보호기간이 끝난 자녀나 늙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도 포함한다. 이 의무는 통상적 인식과 달리 유대인 뿐 아니라 비유대인에게 기부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유대인은 “우리 스스로를 돌본다’에 그치지 않는다. 반대로 유대인 저널에 따르면 유대인 “초고액 기부자”(연간 100억달라 이상 기부하는 사람)의 기부금 중 단지 6%만이 유대인을 위한 일에 사용되었다.
유대주의는 자선을 요청하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결핍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실 탈무드에 따르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 자선을 요청하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결핍에 빠져 있다면 요청을 거절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속임수의 존재는 요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을 줄여준다. 우리는 구걸하는 사람을 의심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부하기 전에 상대의 타당성을 조사하는 것은 허용되는 행위이다.
우리는 체데카를 필요로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누구나 가능한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그의 존엄성을 낮추는 일이라 해도, 공공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면 체데카를 받으며 어떤 수치도 느낄 필요가 없다. 타인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사람은 없다. 사실 체데카를 거절하는 것은 규칙위반으로 여겨진다. 어떤 문헌에 따르면 체데카를 거절함으로써 스스로를 고통에 빠트리는 것은 출혈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체데카의 레벨
어떤 종류의 체데카는 다른 것보다 더 훌륭한 것으로 여겨진다. 탈무드는 이런 체데카의 레벨을 기술하고 있고 람밤이 이것을 리스트화하였다. 훌륭함을 기준으로 낮은 레벨에서 높은 레벨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마지못해 아까운 듯이 주는 것
2. 줘야 하는 것보다 적게 주는 것, 그러나 기쁘게 주는 것
3. 요청을 받은 다음 주는 것
4. 요청을 받기 전에 주는 것
5. 수혜자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서 주는 것, 수혜자는 당신을 앎
6. 당신은 수혜자의 정체를 알지만 수혜자는 당신을 모르게 주는 것
7. 수혜자와 기부자가 서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주는 것
8. 수혜자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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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임]
일전에 EBS에서 유대인의 나눔에 대해 다룬 적이 있고, 관련 동영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영상을 보시려면 여기
http://www.youtube.com/watch?v=UYiCUh-_DhU
그리 재미있지는 않은데 거리에서 플라스틱 들통을 들고 나가 ‘Hello~ You have any sedaka?’ 라고만 하니 사람들이 바로 지갑을 열어 돈을(그것도 지폐를)를 넣는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나름 비영리 기관에 있은지 오래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위의 8단계 늘어놓고 해 보니 틀렸네요. ^^
유대인들에겐 배울게 참 여러가지 인듯 합니다.
삶 자체에서 나눔, 기부, 경제관념을 배우는 것.
1%만 유대인의 피가 흘러도 유대인이라고 정체성 갖는것 등 (우리의 다문화 가정이 힘들어 하는것과 비교되는)
배울 것은 배워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