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6일,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에 내셔널 트러스트의 리디아 헌터스(Lydia Hunters) 팀장이 처칠 펠로우(개인이 해외에서 연수하며 전문성을 키워 영국 사회에 기여하도록 지원하는 글로벌 인재 육성 제도)로서 연구 활동 일환으로 방문했습니다. 최근 한국 기부 문화의 독특한 특성을 함께 확인하고, 서구 사회의 흐름과 대조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브렉시트부터 시작되어 러우전쟁으로 인해 악화된 경기 침체와 더불어 영국의 개인 기부와 봉사는 10년 내내 최저 기록을 갱신 중입니다. 이로 인해 리디아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연구 활동을 시작했고, 이 날 세 가지 핵심 질문(팬덤의 파트너십, 디지털 플랫폼의 영향력, 사회 혁신 트렌드)을 바탕으로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Gemini로 생성된 이미지

1. 팬덤, 단순 후원자를 넘어 ‘IP 확장’의 파트너로

사전 질문을 통해 한국의 팬덤이 ‘기부의 주체’를 넘어 자선단체의 전략적 파트너로 진화하고 있음을 짚었습니다. JYP 엔터테인먼트가 콘서트 현장에서 기부 부스를 운영(Every Dream Matters 프로젝트)하거나, 엔하이픈(Enhypen)이 뱀파이어 세계관을 헌혈 캠페인과 결합해 헌혈 참여율을 폭증시킨 사례는 한국적 ‘서사 중심 기부(Narrative-driven Giving)’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운재단 역시 이러한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2004년부터 재단과 인연을 맺어온 가수 이적님의 <달팽이 기금>입니다. 이 기금은 단순히 아티스트의 유명세에 그치지 않고, 그의 대표곡 <달팽이>가 가진 음악적 서사를 기부의 철학으로 완벽히 치환했습니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꿈을 향해 나아가는 달팽이”의 이미지는 빈곤의 사각지대에서 주거 불안을 겪는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한 ‘주거 안정 지원 사업’과 연결되었습니다. 집을 등에 지고 먼 바다를 꿈꾸는 달팽이처럼, 미래세대가 기초적인 생활 기반(집) 위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기금 명칭과 사업 목적에 녹아든 것입니다. 이는 공인이 나눔의 촉매가 되어 팬과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한국형 필란트로피 모델의 깊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 리디아는 서구의 사례로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팬덤을 언급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서구 팬덤은 아티스트가 좋아하는 숫자 ’13’에 맞춰 기부 금액을 설정하는 등, 아티스트와의 개인적 연결성과 상징적 유대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한국이 팬덤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임팩트를 설계한다면, 서구는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놀이 문화로서의 기부가 두드러졌습니다.

2. 플랫폼 기반의 ‘마찰 없는 기부’와 글로벌 CSR의 공백

한국 대중 기부(Mass Giving)의 핵심 동력으로 네이버 해피빈과 카카오 같이가치를 꼽았습니다. 이들은 기부의 문턱을 낮춘 ‘마찰 없는 기부(Frictionless Giving)’을 실현하며 젊은 층의 일상에 기부를 이식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을 포함한 서구의 상황은 사뭇 달랐습니다. 영국에는 네이버나 카카오처럼 기부 생태계를 주도하는 국내 거대 IT 기업이 부재하며, 그 자리를 구글과 메타 같은 글로벌 빅테크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들 글로벌 기업이 현지 법인세 혜택을 받으면서도 정작 지역 사회를 위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는 소극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플랫폼 기부 모델이 기부 문화를 견인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영국의 디지털 기부 지형에는 로컬 플랫폼의 부재로 인한 CSR의 공동화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3. 사회 혁신의 재정의

인터뷰 도중 리디아가 언급한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는 리브랜딩은 젊은 세대에게 기부를 힙한 문제 해결 과정으로 인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뷰에서 등장한 ‘보살피는 자본주의(Caring Capitalism)’ 담론은 비영리 조직들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L사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초기엔 비영리 조직과 협업하며 필란트로피적 가치를 브랜드에 이식했지만, 노하우를 습득한 이후에는 파트너였던 비영리 조직을 배제하고 자체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업이 자선의 영역을 내재화하여 비즈니스 자산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회 혁신의 주도권이 비영리 조직에서 자본력을 갖춘 기업으로 이동한 이 경우는, 비영리 조직이 단순히 실행 주체를 넘어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증명하길 요구하는 시대가 왔음을 시사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한국 기부 문화의 강점인 강력한 팬덤 서사와 고도화된 디지털 플랫폼이 글로벌 관점에서 얼마나 독창적인 자산인지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동시에 기업이 스스로를 ‘사회 혁신가’로 포지셔닝하는 보살피는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와 비영리단체들이 지켜내야 할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인지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단순한 자선을 넘어 시스템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우리만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