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선순환

해외 스포츠만 보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경기를 직관하러 가면 가장 놀라는 장면이 있다. 9회까지 끊이지 않는 떼창, 선수마다 다른 응원가와 율동을 보면 팬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해외 스포츠 응원 문화에서도 응원가는 존재하지만 한국처럼 팬들이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뤄 선수 한 명 한 명에 대한 서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사례는 흔치 않다.

한국 팬덤의 독특함은 단지 응원의 소리 크기에 있지 않다. 팬들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뤄 선수의 서사를 함께 써내려간다. 선수의 데뷔부터 슬럼프, 부상과 복귀, 은퇴 이후까지도 모두 함께 기억하고 기록한다. 선수가 한 마디 던지면 팬들이 그 말을 먼저 알아채고 선수가 어딘가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팬들이 함께 팔을 걷어붙인다. 선수가 아프면 팬들이 가장 먼저 모금함을 만든다. 이런 결의 팬 문화는 해외에서는 보기 힘들다.

이러한 팬 문화는 점차 한 걸음씩 더 나아가고 있다. 선수의 작은 행동 하나가 팬의 응답을 이끌어내고, 팬의 자발적 움직임이 다시 구단의 공식 사회공헌 활동으로 자리잡는 흐름이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되는 변화이며, 비영리단체와의 파트너십으로도 이어지는 사회적 자산이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이 선순환 구조에 주목하고 싶다. 선수->팬->구단->지역사회로 이어졌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이 흐름 말이다. 팬들이 함께 선수를 향한 애정을 사회적 가치로 표현하고 구단이 그 흐름을 받아 지역사회와 연결하며, 결과적으로 이 변화가 다시 구단과 팬에게 돌아오는 흐름. 이 모습을 KBO 구단의 사회공헌 활동과 과거의 인상적인 캠페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KBO 팬과 구단의 사회공헌 활동 사례

  1. LG 트윈스: 2011년, 박용택 선수가 사회공헌상인 ‘사랑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소감으로 “팬들과 함께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연탄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팬들이 사비를 모으기 시작했고 박용택 선수도 개인 비용을 보태 첫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에 구단도 동참하며 이 봉사활동을 구단의 공식 연례 겨울 행사로 지정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아쉽게 중단되었지만 이 행사를 통해 9년 동안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단체를 통해 서울 지역의 기초생활수급 가정에 전달됐다.
  2. SSG 랜더스: 2026년 4월 30일에 방영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 장기 실종 아동 찾기 특집 1편에서 2016년에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선수들이 등에 본인 이름이 아닌 실종 아동 이름을 새기고 그라운드를 누빈 캠페인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팬들은 선수들의 등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고 자발적으로 검색 챌린지를 시작하여 실종 아동들의 이름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휩쓸어 야구를 보지 않는 대중에게까지도 이슈화했다. 캠페인 이후 선수들이 이때 직접 입고 뛴 유니폼은 자선 경매에 부쳐졌다. 뜨거운 경매 경쟁으로 모인 수천만 원의 수익금 전액은 구단과 함께 캠페인을 진행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실종 아동 수색 재원 및 취약계층 아동 지원금으로 기부되었다.
    2019년부터 시작하여 7년째 유기견 보호소인 ‘아지네 마을’에서 봉사하고 있는 이지영선수의 소식을 들은 팬들은 직접 팔을 걷어붙여 돕기 시작했다. 비시즌 기간(11월 말-2월 초)마다 유기견 치료비 조달을 위해 자선 카페와 애장품 경매 이벤트를 자발적으로 기획하는 등 팬들은 지갑을 열어 기부금을 모아왔다. 점차 이 움직임이 커져 구단과 동료 선수들이 대거 동참하기 시작했고 구단은 자선 행사 홍보 및 플랫폼 지원, 선수들은 자선 카페의 일일 알바로 나섰다.
  3. 롯데 자이언츠: 2000년도 임수혁 선수가 경기 중 쓰러졌을 때 팬들이 자발적으로 치료비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구단과 선수들이 동참하며 약 10년간 겨울마다 ‘임수혁 돕기 일일호프’를 열었고 선수의 부고 소식 이후에도 ‘불우이웃 및 故 임수혁 가족 돕기 행사’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행사를 넘어 12월마다 부산 시민들과 학생들이 모두 참여해 온정을 나누는 부산의 독특한 지역적 기부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름다운재단 ‘이름을 잊어도’ 캠페인

이런 흐름은 야구라는 종목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 스포츠 팬덤 문화 전반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2019년 한 축구장에서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2019년 9월 21일, ‘세계 알츠하이머의 날’을 맞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경기에서 수원삼성 선수들은 평소와 다른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섰다. 유니폼 등판에 마킹된 글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어르신들이 직접 손으로 쓴 이름이었다.

아름다운재단의 치매가정지원 캠페인 〈이름을 잊어도〉와 함께 기획된 이 이벤트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치매 어르신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도 정체성까지 잃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인지능력 재활치료에서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쓰는 글자가 자신과 가족의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이름을 적는 손끝의 떨림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가장 절박한 응원이었던 셈이다.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이 입었던 유니폼은 경매를 통해 판매되어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재단에 기부되었다. 〈이름을 잊어도〉 캠페인은 치매 발병이 개인과 가정에 절망이 되지 않도록, 치매 투병 중인 저소득 어르신께 보조기기를 지원해 스스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보호자의 돌봄 부담과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리는 데 쓰였다.

수원삼성은 그해 9월을 ‘어깨동무의 달’로 정하고 홈경기 2회를 다양한 사회공헌·지역밀착 활동으로 채웠는데, 재단과의 협업은 그 흐름 위에 놓여 있었다. 깊이 있고 지속 가능한 지역밀착 활동을 위한 구단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어깨동무’와, 시민의 작은변화를 지향하는 아름다운재단의 캠페인이 만나는 장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팬들은 단지 경기를 관람한 것이 아니라 선수의 등 뒤에서 어르신의 이름을 함께 호명하는 또 하나의 응원단이 되었다.

 

응원의 대상이 선수나 팀에서 시작해 선수와 구단이 사랑하는 지역사회와 사람들에게로 번져가는이 흐름을 보면 팬덤은 더 이상 일방적 소비자가 아니다. 구단은 더 이상 단순한 스포츠 운영의 주체가 아니고 선수들 더 이상 경기장 안에서만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으로 사회적 변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원이다. 이 주체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한국 스포츠는 가장 한국스러운 방식으로 기부문화를 조성하고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